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티노스 10세 (문단 편집) == 평가 == 콘스탄티노스는 이사키오스의 쿠데타로 일어난 혼란을 수습하는데 노력을 다했으며 이 때문에 군부와의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적어도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았는지 치세 초 4.23 쿠데타가 일어났을 당시 시민들의 암묵적 지지를 받아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또한 몇 년 동안이나 방치되었던 재정 문제도 손을 대어 임박한 재정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그가 축적한 재정으로 [[로마노스 4세]]가 대규모 병력을 모집할 수 있었으며 또한 이후 [[미하일 7세]] 역시 몇 차례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또한 정부의 폭정으로 비춰질 수 있는 일을 일절 중단하고 원로원의 문호 개방 및 실용 법학의 완전한 정착을 통하여 [[콘스탄티노스 9세]]의 정책을 다시 한 번 영속화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이러한 업적은 이후 12세기의 동로마 사회를 특징짓는 하나의 시금석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심각한 어두움 역시 드리워 있었다. 이사키오스의 쿠데타 이래로 동부 전선의 수비력은 이전에 비해 약해져 있었다. 1048년의 두 차례, 1054년의 한 차례 공세를 통하여 셀주크 제국의 군대도 막아내었던 동부 전선의 병력들은 쿠데타로 차출된 병력들이 내전으로 상당수 희생되면서 충원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그 과정에서 재정 능력의 한계와 중앙 정부와 군 사령관들 사이의 불화 및 경계로 인한 보급 지연 등의 문제가 겹쳐 수비 능력은 점점 위험해졌다. 1054년부터 동부 전선에서 셀주크 왕조의 통제와는 상관없이 동로마의 동부 내륙 지방 깊숙이까지 진출하여 파괴를 일삼던 유목민 군대를 1062년~1063년에 들어 격파하긴 하였지만 만성적인 재정적 문제와 변경방어 문제는 고질적이었다. 1063년에 들어 콘스탄티노스가 시도한 아르메니아 - 이베리아의 자생적 방위 능력 구비 사업은 새로운 절도사인 판그라티오스가 무리하게 셀주크 제국과의 갈등을 자극함으로서 파탄을 맞았다. 이때 새로 유입된 대규모 유목민들은 폐허가 된 아르메니아 - 이베리아를 돌파하여 유프라테스 유역에 다다랐으며 간헐적인 공격 끝에 이곳까지 무너뜨리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는 결국 최종 명령권자인 콘스탄티노스가 책임을 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가 후계자로 남긴 미하일 7세나 에브도키아는 이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을 할 수 없었으며, 1067년에 유목민들이 소아시아 방어선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내륙 지역을 잔혹하게 노략한 문제로 시민의 지지는 완전히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콘스탄티노스 10세의 탓은 아니겠으나, 그가 와병한 1065년 10월 이래로 무엇인가 현상 변화를 위한 본격적인 시도를 하지 않은 점은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다. 즉 재능과 비전은 있었으나 여건이 따라주지 않았고, 어쩔 수 없는 판단 착오로 과거의 문제를 미처 해결하지 못해서 후대 황제들에게 짐을 남겼던 셈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